1. 들어가며
근대의료 도입기부터 의사는 높은 진입 장벽과 고된 교육과정 탓에 자긍심과 기대치가 어느 직종보다 높은 존중받는 직업이었다. 어느 시기에나 의사 부족은 국가적 고민이었고, 지역 의사인력 해소를 위해 한지의사제, 무지정의사제, 공중보건의제 등 다양한 정책이 있었다. 약사 수를 늘린 배경이나 일본과 달리 양·한방 이원적 면허제도가 고착된 것도 결국 의사 수 부족이 원인이었다.[
1]
의료 현장에서는 의사 수 확대를 끊임없이 요구 해왔지만, 진료 질 보장과 과잉의료 우려라는 명분아래 시장논리에 역행하며 의사의 희소성은 지속되어 왔다. 인구증가와 고령화, 의학의 세분화는 의사 업무범위의 급격한 확대를 초래했고, 최근 코로나19를 겪으며 전 세계에서 의사부족은 재난수준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최근 서울아산병원에서 간호사가 뇌출혈이 생겼지만 수술할 의사가 없어 다른 병원으로 후송 후 결국 유명을 달리한 일이 있었다. 세계 22,000개 병원 중 30위이자 국내병원 중 1순위로 조사[
2]된 한국에서 가장 크고 의료수준이 높은 병원에서 일어난 믿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최근 OECD의 「2022 한국경제보고서」에서 고령화와 만성질환 의료수요 해소를 위해 의대정원확대를 권고했듯[
3], 부족한 의사인력은 당장은 물론 미래의 큰 짐으로 다가오고 있다. 생명을 다루는 필수분야의 의사 부족은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임은 분명하며, 그 해법을 찾기 위한 논의를 서둘러야 한다.
2. 의사부족 원인에 대한 다양한 입장
의사 부족의 원인에 대한 입장은 극단적으로 다양하다. 한 축에서는 필수분야의 의사 부족은 절대 숫자의 문제가 아니고 원가이하로 낮은 수가가 근본 원인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한다. 뇌혈관 질환의 수가가 우리와 비슷한 보험체계인 일본의 1/5에 불과한 등[
4]을 볼 때 일리가 있는 말이다. 특히 중증 필수의료분야는 더욱 많은 노력과 개인적 희생이 필요하므로 상대적으로 높은 가치를 인정해야 하나 현실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 경영을 생각하는 병원입장에서는 수익이 낮은 분야의 의사를 늘리기 어렵고 따라서 지원자도 적다는 논리다.
하지만 질환별로 매겨진 가격이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한 중증·필수질환이 경증·비필수 질환에 비해 낮다고 볼 수 있을까? 뇌혈관수술에 급성 충수염이나 제왕절개수술 같이 비교적 위험도가 덜하고 흔한 수술보다 얼마나 높은 가치와 수가를 인정할 수 있을까? 분만수가를 얼마로 올리면 분만의료 취약지 문제가 해소될까?
또 다른 의견은 의사의 절대수가 부족하다는 주장이다. 2006년 이후 동결된 의대정원은 급증한 의료수요를 충족하기에 많이 부족한 것이 한 요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의사수는 국토면적과 증가율을 감안하면 오히려 과잉이며[
5], 오히려 각종 건강지표와 의료접근성, 대기시간에서 매우 우수하여 기존의 체계를 잘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6] 그러나 OECD는 인구수 당 우리나라 의사수가 한의사를 포함해도 회원국 평균의 65%에 불과하여 세계에서 두 번째로 적다고 보고한다.[
7] 이정도 수치면 다른 나라와 비교해 의사수가 충분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전문의 비중 증가, 전문분야의 세분화, 여성비중 증가에 따른 군의와 공중보건의의 부족, 노동시간의 감소와 삶의 질 추구 경향, 개원 선호 등 의사 측면의 많은 변화와 더불어 인구 노령화, 만성질환 증가, 건강에 대한 관심과 의료서비스에 대한 기대수준 향상 등 실제적인 의료수요가 매우 늘어난 점을 감안하면 의사 수 과잉주장은 설득력이 적어 보인다.
의사수를 늘리는 것은 시대적 과제임이 분명하지만 인력만 늘린다고 해결되지는 않는다. 이미 주요 필수과목으로 분류되거나 힘들다고 알려진 전문과목의 지원자는 급감하고 있다. 그나마 힘들게 훈련된 필수분야의 전문의조차 개원가로 몰리거나 본연의 활동에서 떠나고 있다.
3.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
필수 분야 의사부족은 국민의 질병으로부터 안전한 삶의 보장에 크나큰 문제를 야기한다. 건강권을 보장할 국가의 책무이행은 필수의료 보장에서 시작한다. 나날이 더해가는 지역소멸의 우려를 덜기 위해서 정주여건 개선을 위한 보건의료보장이 매우 중요함은 모두 알고 있다. 의사가 떠난 지역의 지속가능성은 요원한 일이다. 의사부족 해소는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어느 한가지로 해결은 불가능하며, 중단기적, 여러 각도에서 가능한 모든 정책을 동시에 강력하게 시작하여야 한다.
1) 의대 정원 확대
코로나19는 전 세계가 의사인력 부족을 절감하게 하였다. 우리보다 인구 당 의사수가 2배나 많은 독일도 의대정원을 50%나 늘리기로 하였고, 독일의사협회도 적극 환영했다고 한다.[
8] OECD 평균의 절반에 불과한 우리나라는 인력 활용을 극대화한다 해도 의사부족을 면하기는 어렵다. 최근의 한 연구에 의하면 당장 해마다 1,000명의 의사를 늘리더라고 2050년은 되어야 인구에 필요한 숫자에 도달 가능하다고 분석하였다.[
9] 이제 선발하는 학생이 필요한 술기와 지식을 갖추려면 최소 10~15년이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하루라도 속히 정원 확충을 시작하여야 한다. 보건의료 재난은 자국의 의사만이 감당할 수 있음이 드러난 것도[
10] 의대 정원확충이 근본적 인력 수급의 대안임을 보여준다.
2) 필수의료분야 근무여건 개선
중증, 응급질환을 비롯하여 생명과 중대한 삶의 질을 다루는 분야는 고되고 개인생활의 침해가 필요하므로 지원자가 적다. 일신의 안락만을 추구하고자 의사의 길에 들어선 이가 많지는 않을 것이지만 생명의 소중함을 지키는 데 따른 희생에 대한 보상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제한된 인력자원을 필수분야로 집중하는 운영방안을 찾아야 한다. 필수의료를 제공할 수 있는 의료기관에서 근무하는 것이 한층 매력적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우리나라 전문의의 임금 수준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는 하나[
11] 이는 주로 일부 개원가의 현상이며 필수진료를 담당하는 지역 병원 수준과는 거리가 있다. 민간의료보험과 공모한 과잉진료와 비급여를 줄이고, 사무장병원 난립을 막아 부정이익창출을 막아야한다. 환자를 현혹하는 홍보와 엉터리 과잉진료를 규제하고, 병·의원회계를 투명하게 하여 절약한 재정이 필수의료 현장에서 환자 곁을 지키는 의사의 처우 개선에 투여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
3) 병상수의 합리적 조정
우리나라 인구수 당 병상 수는 OECD국가 평균의 3배에 달한다. 우리나라는 수도권 대형병원의 경쟁적 확장과 요양 병상의 급증으로 탈기관(병원)과 지역통합돌봄으로 지역의료의 방향을 옮기고 있는 세계적 추세에 역행하고 있다. 병상 수 확보는 의료자원의 비효울적 활용과 과당 경쟁에 의한 낭비를 초래하며, 수도권 집중심화로 지역의료의 쇠락을 초래한다. 세계에서 가장 적은 의사수에도 가장 많은 병상을 가진 나라라는 심각한 불균형을 바로기 위해 종별 병원 간 역할의 조정과 의료전달체계의 확립을 통하여 적정 병상 수 산출과 조절에 나서야 한다.
4) 수련과정과 교육 목표 개편
과도하게 분화한 세부전공 수련은 일반적인 지역의료체계에서 작동하기 어렵다. 일부 대형병원에서나 활용 가능하지만, 대부분 수련과정에서 일상화 된 세부분야 편중된 수련을 거쳐 배출된 전문의들은 지역 병원에서 요구하는 일반적 진료(General Practice)에 많은 어려움을 가진다. 1차 진료를 담당할 포괄전문의, 2차 의료를 맡을 통합전문의를 많이 길러낼 수 있도록 수련과정을 전면 개편할 것을 제안한다. 또한 전공의 기간 동안 지역에서 주로 발생하는 일반적 질환의 술기를 익힐 수 있도록 지역 2차병원과 공동수련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전공의를 각 병원의 “말 잘 듣는 싼 인력”이 아니라 “국가의 필수인력”이라는 관점에서 정부의 강력한 지원을 통한 근본적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다.
5) 불요불급한 필수 분야의 외주화
의사 부족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충분한 의사를 충원하고자 서구에서는 외국 의사를 정책적으로 들여오고 있다. 저개발국에 선진적 의료기술의 전파라는 목적과 부족한 필수분야에 해외의사를 활용하는 방안을 심각히 고려할 때가 되었다. 20~50%가 해외의사인 서구와 달리 우리나라의 해외의사 배출 비중은 1% 미만으로 미미하다.[
12] 치료의학에서 선진국에 도달한 국가위상 활용을 위해서도 해외 의사의 도입과 교류를 늘려나가야 한다. 이를 통해 저개발국 의사의 기술지원 역할도 확대할 수 있어 선진국으로서 한국의 국격 상승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6) 일부 업무 위임을 포함한 직종 간 업무의 재분장
그동안 우리나라는 의사-간호사, 간호사-간호조무사는 물론 보건직종 간에 업무범위의 확대와 수성을 위한 끊임없는 갈등이 있어 왔다. 이제는 직종 간 갈등을 상호 협조로 승화시킬 때가 되었다고 본다. 적절한 업무범위의 위임·조정과 질 관리를 통해 부족한 의료 인력난 완화에서 협력자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미 진료보조인력(PA 또는 CPN)은 유수한 상급 대학병원은 물론 대부분 병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은 기정의 사실이며, 이를 합법화 하려는 노력이 있어왔다.[
13] 그간 선진국에서는 이미 직종 간 업무협력을 통한 효율성 제고와 전문성 향상을 위한 제도가 운영되고 있음을 볼 때[
14] 우리나라도 이제는 직종 간 이기주의를 떠나 대승적 관점에서 환자를 위해 업무위임과 재분장에 대해 전향적 검토가 필요할 때가 되었다.
7) 공공분야 의료인력을 위한 교육과정
필수의료인력 부족은 지역격차를 줄이고자 하는 공공병원에서 더욱 심각하다. 또한 임상에 치중 된 인력구조에서 국가 보건의료 정책을 이끌 공공분야 인력양성은 더욱 궁지에 몰리고 있다. 정부나 국제기구 등에서 정책을 만들고 국가를 대표하며 활약할 우수한 의사인력을 양성할 교육과정이 필요하다. 기존 의과대학에 별도의 과정을 만들거나 논의 중인 공공의대(의학전문대학원) 설치가 좋은 방안의 하나다. 국영의료제도를 갖추지 않고 우리와 비슷한 제도를 가진 나라들에서 시행하여 이미 운영하고 있는 제도이므로[15. 16] 우리도 도입을 위한 긍정적 검토가 필요하다.
8) 정부수립 계획의 이행
2021부터 시작한 정부의 제2차 공공보건의료기본계획[
17]에는 필수의료를 중심으로 한 의료인력의 적정한 수급과 관리 계획이 정부의 책임으로 규정되었다. 2020년 시행된 보건의료인력지원법[
18]과 어울려 정부의 의사인력에 대한 계획과 관리를 해야 한다. 지방의료원 등 지역 공공병원의 의료인력 충원을 위해 국립대 정규교수로서 지역 공공병원에서 주민의 진료를 담당하는 「공공임상교수제」 시범사업이 시작되었지만 안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조속히 법률근거를 만들어 공공의사를 제공하여야 지역의 필수의료가 유지될 것이다.
4. 나가며
최근 일어난 초대형 병원의 간호사 사망사건은 그 자체로도 충격적이지만 그 사건의 근본 원인은 더더욱 충격적이다. 근대의료 도입 이후 의사의 부족은 어느 시기, 어느 정부도 해결하지 못한 과제였고, 부족한 의료공공성의 근본 원인의 하나이기도 하다. 한 여성이 가임기간(15~49세)에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 출생아 수를 말하는 합계출산율이 0.8마저 붕괴되어 지구상에서 인구소멸로 사라진 최초의 나라가 대한민국이 될 것이라는 경고[
19]의 기저에는 국민의 삶을 책임지지 못한 국가의 책임이 크다. 정의롭고 상식에 기반한 사회의 기본은 건강한 국민이고 공공의료는 그런 사회의 핵심 도구이다. 더 이상 계획만 짜지 말고 보건의료의 공공성을 늘리기 위한 실천에 나서길 바란다. 매우 늦었음을 깨달은 지금이 가장 빠른 때다. 아직 포기할 때는 아니다.